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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시 하나
생선가시가 목에 걸렸다.
점심 때 구운 생선을 먹다가 뭔가 목에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차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침을 삼켜보니 아니나 다를까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다. 가시가 목에 걸리면 쌈을 크게 싸서 먹으면 내려가는 수가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여러 번 크게 쌈을 싸서 먹어보았지만 여전히 가시는 거기 있었다. 서서히 아픔이 느껴지면서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노스쇼어 병원에 갔다. 나는 생선가시에 목에 걸렸다고 말하면 우선적으로 내 이름을 불러줄 줄 알았는데 간호사는 기다리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아픔 때문에 침도 삼키지 못하고 억지로 참고 있으려니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2시간을 그렇게 기다리다가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고 다시 30분을 기다렸는데 노스쇼어 병원에는 이비인후과 의사가 없으니 오클랜드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오클랜드 병원에 가서 내시경을 해 본 결과 가시는 없다고 했다. 내가 느끼는 아픔은 가시가 할퀴고 간 자욱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가 목이 붓고 아프면 다시 오라고 했다. 다행히 의사의 말대로 그 다음날이 되자 목의 통증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그 다음날에는 완전히 기억에서 잊어버릴 만큼 회복이 되었다.생선 가시 하나.
나는 그날 참 많은 교훈을 얻었다. 내가 얻은 첫 번째 교훈은 찬양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병원 외래 응급실에 앉아 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침도 못삼키고 아파서 쩔쩔 매고 있었을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종이에 써서 했다. 내가 종이에 글자를 쓰면 남편은 그것을 읽고 말로 대답해 주었다. 그때 내 마음에 “찬양”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졌다. 말을 할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물론 나는 말하는 것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막상 말을 할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러나 말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무척 불편하겠지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찬양은 할 수 없다. 그때 나는 입의 기능 중에는 먹는 것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찬양의 기능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물론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고 생각으로 찬양할 수 있다. 몸으로 찬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입을 벌려서 목소리로 찬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임을 나는 그 시간에 온몸으로 철저하게 깨닫고 있었다.내가 얻은 두 번째 교훈은 “권위”에 대한 것이었다.
오클랜드 병원에서 나는 네 명의 의사를 만났다. 금요일 오후, 다른 의사들은 대부분 퇴근한 시간에 응급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그들은 인턴 아니면 레지던트일지도 모른다. 한 눈에 보기에도 어찌나 어리고 앳되게 보이는지 우리 집의 큰 애나 작은 애 또래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의사이기 때문에 환자에 대한 그들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다. 만약 내 남편이 “당신 가시가 없는데 공연히 아프다고 하는 거 아냐?” 라고 했다든지 그들 의사 또래의 젊은이가 “우리 엄마도 그런 적이 있는데 가시가 없다더라. 그러니 당신도 그럴 것이다.”라고 했다면 나는 분명히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 “가시가 없다니? 그럼 침도 못삼키고 목이 이렇게 아픈 것이 왜 그런 거냐?” 며 가시가 분명히 목에 박혀있다는 내 생각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게 보여도 그들이 의사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내시경을 몇 번이나 해보고 난 뒤에 가시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하나님께 그렇게 말씀드렸다. “그래요, 하나님,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제가 다 믿을게요. 20대 초반인 젊은이들의 말도 그들이 의사이기 때문에 내게 권위를 가진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권위는 얼마나 엄청난 것일까요? 예, 주님. 저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제가 그대로 믿습니다. 저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인해 깨끗이 씻어졌다는 말씀도 그대로 믿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어서 영생과 영벌이 있다는 말씀도 하나님의 권위 그대로 제가 믿습니다.” 또한 나는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회개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은 결국 최종 권위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다는 무언의 시위가 아니고 무엇일까. 순종이란 결국 나의 모든 최종 권위는 하나님께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나의 출생과 죽음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내가 행하는 모든 삶의 권위를 하나님께 돌려드릴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상처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가시는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간에도 나는 목언저리에 아픔을 느꼈다. 가시의 흔적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상처는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때때로 우리의 삶에 커다란 아픔을 남긴다. 비록 그 상처가 치유되고 난 다음에도 말이다. 예전에 돌이 갓 지난 아이가 허벅지에 종기가 생겨서 병원에 간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종기의 고름을 짜내면서 아이는 무척 울었다고 한다. 보드라운 살에 종기가 생겼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아이 엄마는 치료 후에 아이를 달래느라 병원에 있는 커다란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을 보여주며 어렵게 아이를 달랬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아이가 어떤 건물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도 커다란 수족관이 있었는데 물끄러미 물고기를 바라보던 아이가 갑자기 악을 쓰면서 울더라는 것이다. 물고기를 보는 순간 예전의 아픔이 되살아난 것이다. 겨우 돌이 지난 어린 아이. 그리고 그 종기는 이미 다 아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은 아이의 마음 속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육체의 상처는 치유되기가 쉽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기도 어려울뿐더러 치유되었다고 생각한 이후에도 쉽게 우리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남긴다. 일생을 살면서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도, 그리고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사람도 없다. 아무리 나는 상처받으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사실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면서 또한 가해자이다. 어떻게 하면 받은 상처를 잘 관리할 수 있을까. 그래서 상처 받기 전보다 더 성숙한 인격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처를 덜 주고 살 수 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찬양, 권위, 그리고 상처. 목의 아픔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에도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단어들이다. 작은 생선 가시 하나. 그 아픔까지도 내게는 소중한 교훈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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