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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에 깨닫는 행복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었다. 내가 운전하고 있던 차가 빨간 신호등에 걸려서 서 있는 동안 차창 밖을 내다 보았다. 그런데 그때까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던 한 남자 아이가 갑자기 큰 도로를 건너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아이는 날씨가 꽤 쌀쌀한 겨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짧은 팔 교복을 입고 있다. 헤어 스타일을 보니 한국 학생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유행하는 긴머리를 적당히 터프하게 적당히 멋있게 빗어 넘겼다. 한국 아이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 아이에게 공연히 신경이 쓰인다. 아이의 교복을 보니 저 밑 동네에 있는 남자 학교다. 학교에 가려면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길을 건너고 있으니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다. 아이가 왜깅(수업을 빼먹고 돌아다니는 일)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길 건너에는 맥도널드가 있다. 아이가 아침을 굶었을까. 배가 고파서 햄버거 하나 먹고 가려고 그러는 것일까. 그러면 지각일텐데. 몸이 많이 말라보이는 아이가 결석하지 않고 학교에 가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은 공부가 힘들고 사는 것이 힘들고 자신의 미래가 힘들어 보이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 인생을 단정짓지 말고 희망을 품으라고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일수록 단정적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줄 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의견만 고집한다. 자기 생각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울 줄 안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물러선다.
나는 누구보다도 단정적이고 내 의견만 고집하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그것이 젊은 날의 치기(稚氣)일 수도 있지만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에 대해 편견이 심한 사람이었다. 대학의 신입생 시절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미장원 이야기 옷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규칙을 따라 항상 교복을 입고 단발 머리를 하던 시절을 벗어나 이제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 원하는 머리를 할 수 있게 된 여자 아이들로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자유였던가. 무서운 학생부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들이닥쳐서 자를 귀밑에 딱 들이대며 귀밑 3cm가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들고 있던 가위로 사정 없이 싹둑 잘라놓고 나간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 아닌가 말이다. 차마 울지도 못하고 꾹 참고 있던 아이들은 학생부 선생님들이 나가고 나면 곧 책상에 엎드려서 어깨를 들먹이며 서러워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억압과 구속 아래 해방되었다는 그 감격은 아마 광복절의 감격 만큼은 못해도 소리내어 당당하게 외치고 싶은 충분히 이유 있는 흥분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그것이 영 못마땅했다. 나는 그것을 여자들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단정”지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머리에 든 게 없을까. 왜 맨날 모이면 그렇고 그런 이야기밖에 할 수 없을까. 나는 결코 이런 수준 낮은 삶을 살지 않으리라. 그 당시 나는 영문과와 사학과에 다니는 아이들과 의기투합한 친구가 되었는데 적어도 우리 4명이 만났을 때는 미장원 이야기 옷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면 소크라테스와 소포클레스를 논했고 디오니소스와 몰리에르를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알면 얼마나 알 것인가. 그런 터무니 없는 지적 교만으로 세상의 모든 여학생들을 단정지은 나 자신이 스스로도 부끄러워진다.
얼굴만 해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기미가 낀 내 얼굴은 엉망이다. 그래도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미소를 보낸다. 나도 한때는 깨끗한 얼굴을 가졌었다. 피부가 좋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얼굴이 깨끗했을 때 누군가 피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오이 팩을 하네 무슨 맛사지를 하네 하면 솔직히 좀 경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람은 내면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얼굴에다가 저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은 속 빈 여자들의 쓸데 없는 낭비가 아닌가.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그때는 내 얼굴이 깨끗했기 때문에, 젊음을 가진 자였기 때문에 얼굴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 이미 젊음을 보내버린 자들의 마음을 전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단정지은 것은 내가 그들보다 지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안다고 단정지은 나의 어리고 유치한 교만 때문이었다.
산다는 것은 이러한 우리의 편견이 깨뜨려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다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사람은 힘을 가지기를 원한다. 20여 차례의 성폭행으로 구속된 한 남자는 “자기 앞에 힘을 못쓰는 여자들을 볼 때 만족을 느꼈다.”고 말했다. 자기 남편을 통제하고 자기 아내를 통제하고 부하 직원을 통제하고 자녀를 통제하기 원한다. 모든 것이 자기 말대로 되는 세상, 얼마나 살맛날 것인가. 아이들은 컴퓨터 안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싸우고 죽인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쩔쩔맬 때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한국 사람들은 만나면 먼저 나이부터 묻는다. 주도권을 쥐고 상대를 통제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 아닐까. 나이가 파워가 되고 직업이 파워가 되고 돈이 파워가 되는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우리는 서로를 통제하려고 보이지 않게 혈안이 되어 있는지 모른다.그러나 아무리 물리적으로 사람을 통제하고 있어도 마음으로 따르지 못하게 하는 사람은 심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마음으로 따르게 하는 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인격적인 힘이다. 물리적인 힘은 쉽다. 그러나 인격적인 힘은 참 어렵다. 어떤 10대 후반의 아이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버릇없이 굴기에 유심히 지켜보니 그의 아버지는 몹시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를 매로 다스린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아이는 아버지 앞에서는 일절 반항 없이 고분고분하지만 그 아버지가 없는 데서는 오히려 버릇 없는 아이가 되고 만 것이다. 물리적인 힘은 순간적이다. 인격적인 힘이 없을 때 그 결과는 비참하다.
예수님은 좁은 길과 넓은 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좁은 길은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좁은 길을 찾지도 않을뿐더러 찾았다 하더라도 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밟히고 밟으면서도 넓은 길에 서 있다. 그곳은 온갖 변명과 자기 합리화가 소리치는 길이다. 쾌락과 편리에 안주하면서 이것이 세상 사는 낙(樂)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길이다. 나를 단정짓지 않고 내 영악함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좁은 길로 들어서는 행복, 그것이 이제 나이 오십에 들어서면서 느끼는 나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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